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18 민주화운동/의문점 (문단 편집) === 의혹: "오후 1~2시부터 진압 시작" === 그러나 신군부의 주장과 공식 사실과는 달리, 18일 공수부대가 시내에 등장한 시각을 두고 또 다른 주장이 있다. 실제로 18일 7공수여단의 진압 작전과 살상 행위가 오후 4시가 아닌 ''''오후 1~2시''''부터 진행되고 있었다는 일부 기록과 목격자들의 증언이 상당수 존재한다. >'''11:40''' - 7공수여단 33대대 출동 예정. >---- >'''보안사령부 「광주사태 일일속보철」(!)''' 中[* 노영기 『그들의 5.18』, 푸른역사 2020., p153~154] >'''12:45''' - 7공수 33대대, 31사 96연대로부터 가톨릭센터 앞 데모대 '''진압 명령 수령'''. >'''14:42''' - 7공수 35대대, 31사 96연대로부터 도청 앞 데모대 '''진압 명령 수령'''. >---- >'''「특전사 전투상보」(!)''' 中[*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 풀빛 1990., p24~25] >'''오후 1시께''' 광주역 인근 고속도로 진입로에서 전시에서나 볼 수 있는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트럭마다에 가득 실려 시내 중심부를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 >김준태 『5월과 문학』, 남풍 1988.[* [[광주매일신문]] 『정사 5.18』, 사회평론 1995., p173~174에서 재인용.] >한편 '''오후 1시쯤 수창국민학교에는 20여 대의 군용 트럭들이 집결하고 있었다.''' 병력은 전원 공수대원들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한두 시간 동안 작전 명령을 받고 조를 재편성했다. 공수대원들은 모두 완전 무장을 갖추었는데, 얼굴에 투석 방어용 철망이 부착된 철모를 쓰고, 총은 등에다 엇비슷하게 메고, 한 손에는 대검을, 또 다른 손에는 살상용 곤봉을 들고 있었다. 이들은 '''오후 2시부터 시외버스 터미널을 출발점으로 해서 시내 곳곳으로 돌아다니며 진압을 시작했다.''' >---- >전남사회운동협의회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초판), 풀빛 1985., p42 >'''1시가 조금 넘어서''' 수창초등학교 앞에 당도하니 공수들이 5열 횡대로 차도를 막고 있었다. 그들은 총을 비스듬히 메고 곤봉을 총검술 자세로 받쳐든 채 지휘관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한발 한발 움직이고 있었다. 20-30명의 학생들이 그들을 향해 돌을 던졌다. 그때였다. 지휘관의 긴 호루라기 소리를 신호로 공수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길가는 시민들을 붙잡아 무자비한 살상을 시작했다. 나는 데모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무원인 신분을 믿고 계속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들리는 요란한 군화발 소리에 놀라 돌아다보았다. 수십 명의 공수들이 나를 향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나는 학생이 아니오, 나는 공무원이오' 하고 황급히 외쳤으나 그들은 곤봉을 내리치고 발길질을 해댔다. 나는 그들의 곤봉에 머리를 맞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 >김정섭(당시 공무원) 증언[*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 풀빛 1990., p24] >'''오후 2시 15분에서 20분 사이''' 수창국교 육교 인근에서 등에 총을 메고 진압봉을 든 공수부대와 대학생 간의 충돌을 목격했다. >---- >박병률 씨 광주청문회 증언, 1989년 2월 23일[* 광주매일신문 『정사 5.18』, 사회평론 1995., p174] >'''점심시간 이후 얼마 안 있어''' 시내에서 학생들이 연행돼 와 쪼그려 뜀을 하는 등 기합을 받은 뒤 대학 건물로 끌려가는 것을 봤다. >---- >김웅산(당시 전남대 수위) 증언[* 광주매일신문 『정사 5.18』, 사회평론 1995., p174] >북동우체국 인근에 있는 형님 집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2시께''' 공용터미널 앞으로 나가 봤다. 소방서 쪽에 '''계엄군이 포진'''해 있고 로터리 쪽에는 수많은 시민, 학생들이 있었지만 분위기에 눌려서인지 거의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 '''그러던 중 뒤쪽에서 갑자기 공수부대가 튀어나와 무차별적인 진압을 시작했다.''' 순식간에 상황은 변해 시위대는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나는 급한 김에 공용터미널 옥상으로 피신했다. 잠시 후 옥상에서 내려와 공수부대원들에게 대항했으나 총검과 진압봉, 그리고 인정사정 없는 구타 앞에선 역부족이었다. >---- >이재의(당시 전남대 경제학과 3학년) 증언[* 광주매일신문 『정사 5.18』, 사회평론 1995., p161~162] >'''오후 3시가 가까워지면서''' 자동차보험 쪽으로 나가 봤다. 시위대 2~3백 명이 전경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전경 지휘자는 군인들이 곧 투입될 것이니 귀가하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10분이 지났을까 공수부대원들이 들이닥쳤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무지하게 두들겨 팼다. 위협을 느낀 나는 잠시 후 터미널 내 배차실로 숨었다. 거기서 내다보니 공수부대원들이 대한극장 앞에서 구타를 견디지 못해 실신한 학생들을 가마니 던지듯이 싣고 있었다. >---- >임열학(당시 공용터미널 직원) 증언[* 광주매일신문 『정사 5.18』, 사회평론 1995., p162] >당일(18일) '''오후 2시경'''에 22세 남자가 공수부대원에게 곤봉으로 머리를 가격당해 응급실로 왔다. 이때를 기하여 오후 내내 18일 총 16명의 환자가 왔는데 대부분 곤봉으로 가격당해 두부열상, 골절, 찰과상 등 외상 환자가 대부분이었다. >---- >김현종(당시 전남대병원 외과 레지던트) 증언[* 노성만 외 『5.18, 10일간의 야전병원』, 전남대병원 2017., p53~54] 그리고 당시 11공수여단장이었던 최웅 준장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오후 3시께''' 정호용 장군이 숙영지인 동국대로 찾아와 '''광주 7여단 2개 대대가 계엄군으로 나가 있는데 소요 진압 작전을 못하고 매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11여단을 증파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 >최웅 광주청문회 증언, 1988년 12월 20일[* 광주매일신문 『정사 5.18』, 사회평론 1995., p174] 다음은 1988년 광주청문회를 앞두고 평화민주당에서 접수한 「피해자 신고서」에 나와 있는 18일 부상자 사례 중 일부이다.[* 이해찬, 유시민 외 『기억하는 자의 광주』에서 재인용] >김규진(남, 50, 당시 교사) - '''오후 3시경''' 가톨릭센터 앞에서 공수에 허리를 발로 채이고 개머리판으로 맞는 등 전신 구타당해 앞니 4개가 빠지는 등 부상. >---- >김남일(남, 48, 당시 운전기사) - '''오후 3시경''' 광주공원 부근에서 공수에 구타당해 우척골 골절당하고 연행. 5.20.에 통합병원 후송.(우상지, 안면부, 옆구리, 좌족 타박상) >---- >김범동(남, 34, 당시 조리사) - '''오후 3시경''' 충장로 5가 입구 중국집(제일관) 주방장 근무 중 광주일고 구내이발소 정문 앞에서 여자 1명이 공수부대 3명에 옷도 찢기고 발로 차이면서 집단 구타 목격 중, 갑자기 금남로5가에서 몰려온 30~40명의 공수가 다가와 가게 유리창 파괴, 집단 구타, 의식 잃고 쓰러짐. >---- >박병률(남, 당시 조선대 의대 2학년) - '''오후 2시경''' 광주일고 교정에서 구타당함. >---- >양일준(남, 29, 당시 기능공) - '''오후 2시경''' 신안동에서 공수에 구타당하고 연행됨. 통합병원에 후송돼 한 달 이상 치료받음. >---- >이승민(남, 49, 당시 상업 종사) - '''오후 2시경''' 광주소방서 옆 본인 점포에 난입한 공수들에 무차별 구타당하고 실신함. >---- >장성암(남, 23) - '''오후 2시경''' 수창국교와 공용터미널 사이에서 공수 7명에 곤봉, 군홧발, 개머리판 등으로 전신 구타당하고 실신. >---- >하용만(남, 34, 당시 건축미장) - 금남로5가 송월정 건축 미장작업 마치고 귀가하던 중 '''오후 3시경''' 충장로4가 도로에서 공수가 이유 없이 무자비하게 구타하여 실신한 채 트럭에 실려 연행됨. >---- >김막동(남, 25, 당시 건축 종사) - '''오후 3시경''' 예비군 훈련받으려고 공용터미널에서 장흥행 버스에 올라타 출발을 기다리고 있는데 공수가 갑자기 차내로 올라와 본인을 끌어내어 진압봉으로 머리 등 전신을 구타. >---- >박용기(남, 22, 당시 학생) - '''오후 2시경''' 전대 후문 입구에서 3명의 계엄군에 구타를 당하고 전대로 끌려들어 갔다가 의식불명.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